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
나는 책 중독자다. 책 중독자라 말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고, 책 중독자라고 밝히는 것이 대단히 큰일도 아니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닌 것 같아 부끄럽다. 그리고 정말 대단하신 책 중독자분들도 많은데 내가 그분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건 아닌지 약간 두렵기도 하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께서는 “얘 지금 뭐하는 거야?”라고 고개를 갸우뚱하시거나,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야?”라고 화를 내실 수도 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린다. 나는 어떻게 책 중독자가 되었는지 고백을 하려 한다. 그리고 책 중독자가 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받은 책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평소대로 책장의 책들을 훑어봤다. 순간 깨달았다. 아직 읽지도 않고 사 모은 책이 굉장히 많다는 걸. 그럼에도 난 그날 책을 또 사왔다. 이런 행위는 내겐 일종의 ‘습관’이다. 가만히 생각해봤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책을 샀지?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책을 읽으려했지? 어떤 책을 읽었기에 이렇게 감당 못할 정도로 책을 사곤 하는 거지?
맨 처음 독서에 대해서 충격을 받은 책이 한 권 있다. 학교 선배가 권해준 책이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문학 비평으로 유명한 김현의 『행복한 책 읽기』(문학과지성사)란 책이다. 이 책은 ‘김현의 일기’라는 부제가 있다. 흔히 우리는 일기는 그 날 그 날의 사건사고(?) 및 그에 대한 감상을 적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현의 일기는 그렇지 않았다. 일기 자체가 하나의 짧은 서평이요, 아름다운 수필이었다. 그리고 그런 글을 몇 월 며칠 날짜를 달아가며 꾸준히 썼던 저자의 글 솜씨에 넋이 나갔다. 자연스럽게 김현이 읽었던 책들은 대체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고 그렇게 한 권 한 권 책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책의 목록을 만들어 읽은 책은 빨간 줄을 긋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욕심이 났다. 더 많은 책들, 좋은 책들을 알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선배가 다른 책 한 권을 권해줬다. 그 책은 유명한 『장정일의 독서일기』(범우사) 시리즈였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김현의 글처럼 그 날 그 날의 독서를 꼼꼼히 정리해 놓은 책이다. 김현의 글에도 놀랐지만 장정일의 글에 더 놀랐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책이나 마찬가지다.”란 저자의 독서관도 멋졌고, 엄청난 독서량과 독서일기를 꾸준히 써내는 저자의 필력에 감탄했다. (그 필력은 여전히 대단해서 현재 독서일기가 7권까지 나왔고 최근에는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권이 나왔다.)
그런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다보니 읽고 싶은 책이 셀 수도 없이 늘어났다. 찾아 읽고 또 찾아 읽어도 끝이 없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은 읽고 싶은 책이 절판일 때다. 그런 책을 구하려고 고민하다 ‘헌책방’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헌책방의 세계는 정말 ‘신세계’였다. 읽고 싶었던 책, 구하기 힘든 책을 우연히 구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다 ‘헌책’에 대해서 쓴 책은 없을까 찾아봤다. 그리고 서점에서 조희봉의 『전작주의자의 꿈』(함께읽는책)이란 책을 구입하게 됐다. 이 책은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이란 부제처럼 저자가 헌책을 모으고, 또 책을 읽으며 느낀 점. 헌책방에 관한 정보. 헌책 보관법 등이 알차게 담긴 책이다.
이 책에서 주목한 건 ‘전작주의’의 의미였다.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음으로 작가의 정신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는 뜻으로 난 받아들였다. 그 당시 장정일을 굉장히 좋아했기에 장정일이 그때까지 발표한 작품을 모두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또 책에 소개된 헌책방들을 다 가봐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대로 실행했다. 앞에도 말했지만 그 세계는 정말 ‘신세계’였다. 읽고 싶은 책, 갖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았다. 어쩔 수 없었다. 열심히 샀고 열심히 읽었다.
그러다 최종규의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무려 900쪽에 가까운 이 책은 저자가 1년 동안 헌책방을 다니며 구하고 읽은 책들에 대해 쓴 책이다. 압도적인 분량과 글의 정갈함이 돋보였다. 저자가 얼마나 발품을 팔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글을 썼는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책을 사고 또 책 읽는 것은 정말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저자는 글에 ‘사람이 먼저 되고 책을 봐야 한다. 책을 봐서 사람이 될 생각을 하지 말라. 사람이 안 된 채로 책만 많이 보면 사람됨을 제대로 갖추기 힘들다’고 했다. 지금도 이 말은 내게 괴로운 질문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런 괴로움에도 거부할 수 없는 건 좋은 책들의 유혹이다. 『헌책방에서 보낸 1년』만 봐도 정말 읽고 싶은 책이 산더미 같았다. 어쩔 수 없다. 계속 책을 찾고, 사고, 읽는다.
이런 생활을 오래하면 자연스럽게 책장이 넘쳐나고 책이 방바닥에 쌓이면서 가뜩이나 좁은 방이 더 좁아진다. 그러면 좋은 책을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이 책을 더 많이 놓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욕심으로 진화한다. 이런 욕심에 불을 지른 책이 한 권 있다. 박래부의 『작가의 방』(서해문집)이란 책이다. 이 책은 김영하, 공지영, 신경숙 같은 우리 시대 대표작가의 책과 서재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작가들의 서재가 고스란히 담긴 사진들이었다. 그 사진들 속에서 내가 읽었던 책들을 발견하는 기쁨이란! 그리고 정말 궁금한 책들. 저 책은 왜 작가의 책장에 꽂혀 있을까? 어떤 책일까? 어떤 내용일까? 알고 싶고 읽고 싶은 욕심이 마구 샘솟았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책을 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은 ‘서재’에 대한 사진과 이야기가 담긴 책들을 찾아 읽게 만들었다. 그중 김태경의 『좀 더 가까이』(동아일보사)는 정말 부러운 책이다. 이 책은 작가들의 서재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서점, 북 카페에 관한 내용도 함께 다루고 있다. 이 책의 글과 사진들을 보면 책을 읽고 모으길 좋아하는 책 중독자들이 꿈꾸는 공간이 정말 ‘동화처럼’ 펼쳐져 있다. 이런 꿈을 꾸고 또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계속 책을 찾고, 사고, 읽는다. 또 사고, 읽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지금의 내가 있다. 현재 서점에서 일하고 있고, 친구의 집에 놀러 가면 친구 얼굴보다 책장을 먼저 훑어보며,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으면 어떤 책인지 너무 궁금하고, 읽지도 못한 책이 피라미드처럼 쌓여있는데도 ‘저축’의 개념으로 계속 책을 사고 또 그렇게 책을 읽는 지금의 나. 대책 없는 책 중독자. 이런 고백을 하고나니 굉장히 부끄럽다. 나의 책 읽기를 되돌아본다. 좀 더 열심히, 더 열정적으로 책을 읽고 싶다. 세상에는 수많은 중독자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책 중독자임은 정말 다행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책 중독의 세계. 이것만큼 매력적인 게 또 있을까? 오늘도 어김없이 사야하고 또 읽을 책들의 목록을 작성한다. 장정일의 명언을 다시 빌려온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책이다!”
사족 하나) 이 글의 제목은 톰 라비의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돌베개)에서 빌려왔다.
사족 둘) 독서일기, 헌책, 서재 관련해서 최근 즐겁게 읽은 책 세 권입니다. 닉 혼비 『런던 스타일 책 읽기』(청어람미디어), 박균호 『오래된 새 책』(바이북스), 한정원 『지식인의 서재』(행성:B잎새)
(경인문고 홍은표)
(11. 10. 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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